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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위대한 미술가

세기의 위대한 화가_쿠르베

by 닌자4js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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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위대한 화가_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년 6월 10일~1877년 12월 31일 프랑스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


구스타브 쿠르베는 스위스 국경 지역인 프랑 슈 콩테 지방의 소도시 오르낭에서 1819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지주였고, 어머니는 법률가 집안의 딸로 쿠르베는 이와 같은 부유하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양육되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 
12세에 오르낭의 중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학문과 처음으로 그림 수업을 접한 쿠르베는 그 후 왕립 고등학교에 18세에 입학하여 그 지역의 화가에게 본격적인 유화 수업을 받게 된다. 이공계열이나 법률 계열의 공부를 원했던 부모에 반하여 쿠르베는 화가로서의 길을 이때부터 결심하게 된다. 그 후 법률 공부를 이유로, 파리로 유학하면서 화가로서의 삶을 준비한다. 들라크루아가 다녔던 화실인 아카데미 슈이스를 나가 데생 공부하고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고, 특히 그가 관심을 가졌던 16세기에서 17세의 베네치아파와 네덜란드, 스페인의 거장들 작품을 모사하면서 점차 그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1844년 파리로 온 지 4년 만에 쿠르베는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하게 되는데 이때의 작품이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자화상]이었다. 45년에는 [기타를 치는 젊은이]로, 46년에는 [M의 초상]으로 입선하여 순탄한 길을 가게 된다. 그 후 네덜란드 화상 후원자의 도움으로 네덜란드를 여행하게 되고, 17세기 풍경화가 로이스탈과 렘브란트와 할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후 1848년 2월 혁명 이후 그가 예전에 살롱에서 낙선했던 전 작품 [오르낭의 사후]가 2등 상을 받으면 입선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쿠르베의 화단에서의 위치를 굳건히 해 주는 작품이 되며, 또한 들라크루아는 신인 쿠르베를 ‘혁명 화가’라 칭송했다. 
이렇게 대체로 순탄했던 그의 길에 1850년 겨울과 1851년 봄에 걸쳐 비난받는 일이 발생한다. [돌을 캐는 사람], [시에서 돌아가는 브라제의 농민들], [오르낭의 매장]이 3점의 작품들이 비속과 추악의 예찬이라고 비난당하며, 쿠르베가 주장한 사실주의는 ‘야만스러운 회화의 법칙’이라고 매도되었다. 그러나 당신의 이런 비난과 공격은 실상 쿠르베의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예고하게 되고, 또한 그의 사실주의적 정신이 이 세 작품 속에 가장 진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특히, [오르낭의 매장]은 가난하고 볼 것 없는 한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우연적 사건을 당시 역사화로 대변되었던 위대함을 평범한 사건 속으로 끌어내리며 쿠르베의 도전 의식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는 당시 벤츄리가 말한 대로 쿠르베는 ‘빈한한 지방의 일상생활에 영웅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다른 화가들의 역사화에 대처하는 정신을 풍속화로 취급’한 것이었다. 이것은 회화의 역사에서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이 작품에 따른 이러한 설전들이 잦아지면서 새로운 예술이 겪어야 하는 과도기적 진통을 보게 된다. 1853년 [미역 감는 여인들]이 또 한 번의 이런 진통을 겪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 전까지의 이상화된 자연풍경과 님프와 같은 등장인물이 아닌 지나치게 현실적인 있는 그대로의 노출이란 점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함을 당시의 사람들은 비속적이라 생각하고 불편해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1863년 살롱 낙선작인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였다. 그러나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쿠르베에게 흥미를 갖는 미술 애호가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브뤼아스로, [미역 감는 여인들]을 비롯하여 몇 작품을 사들이고 쿠르베를 자신의 마을로 초대하였다. 
쿠르베의 기성 화단에 대한 도전은 1855년 개인전을 시점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 해 살롱은 만국 박람회와 같이 열렸는데, 쿠르베는 [오르낭의 매장]과 [화가의 아틀리에]를 포함하여 총 13점을 출품하였으나 주최 측은 이 두 작품의 전시를 거부한다. 이에 분노한 쿠르베는 개인전을 통해 만국 박람회에 대항하여, 입장료 단 1프랑으로 사실주의 G.쿠르베 자작 유화 40점과 데생 4점 전람이라 선전하며 정부와 화단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나 결과는 쿠르베의 완패였다. 만국 박람회의 도움을 받은 50명의 미술 평론가 중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쿠르베를 지지했을 뿐이었고, “리얼리즘이란 무지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쿠르베는 자신을 조소하고 타인을 조소하고 자신의 예술을 조소했다”란 조소의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조소에 쿠르베는 위축되어 1857년의 살롱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평범한 작품들을 출품하였으나 그동안 그가 끼친 영향들의 결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사실주의 정신은 점차 화단에 스며들어, 그 당시의 아카데믹한 역사화에 반한 사실주의 등장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쿠르베의 승리를 시사하는 것이고, 사실주의 거장으로 서의 자리매김을 알린 것이기도 하다.
사실주의는 당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으며, 역사나 신화에서 구했던 주제를 현실에서 가져왔다는 점에서 인상주의의 구현이기도 했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를 제외하고는 인상주의를 생각할 수 없다. 
쿠르베는 정치적 성향이 짙은 예술가로서, 그의 말년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의해 비극의 길을 가게 된다. 1871년 파리 폭동으로 파리 코뮌을 탄생시키고, 그는 예술가 협회 대표자가 된다. 이에 따라 코뮌이 정부군에 무너졌을 때, 쿠르베는 엄청난 책임을 지고 체포되어 3개월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다가 보석으로 풀려난다. 그러나 그에게 법정에서 주어진 큰 부담 금액은 당시 32만 3,091 프랑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이에 프랑스에서 스위스 국경 지방으로 탈출하여 망명하게 되었고, 여러 곳을 전전하다 레반 호반에서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가 의식을 가지고 도전적인 작품상을 반영한 작품들은 1855년을 전후로 한 시기로 끝난 느낌을 주고, 그 이후의 그림들은 단순한 동물, 풍경, 정물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저 직접적인 관찰에 의한 사물의 재현에 중심을 두고, 중추적인 의미나 내용을 담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프베의 사실주의는 사회적 의식을 반영한 시기의 작품들이나, 만년의 작품들 모두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냉철한 관찰자의 눈으로 사실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 동일한 맥락을 유지하고 있고 사실주의 대가로 후에 등장하는 미술 사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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